누구나 한번쯤 잘못 만들어진 책을 손에 넣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제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책장이 하나하나 뜯어져 나간다거나, 다음 장으로 넘기려고 보니 책장 두개가 붙어 있어서 본인이 칼로 들쭉날쭉 잘라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본문 페이지에서는 별 일이 없어 책을 읽는 데는 별다른 무리가 없지만 맨 마지막 장이 겉표지에 붙어 있는 등의 문제로 기분이 찝찝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책을 딱 두 번 접했었는데, 그런 일을 겪을 때면 괜히 책을 읽다가 맥이 툭 끊겨 버렸다. 신나게 책을 읽다가도 괜히 뭔가에 속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파본 상태는 책을 읽기 어려울 정도의 강도 높은 파본이었다. 인쇄가 아예 안 된 것인지 8페이지가 백지였다. 그것도 드문드문 백지여서 내용 연결이 되지 않아 몇 개의 에피소드는 그냥 넘겨야 할 정도다.
하지만 나는 투덜거릴 수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없는 페이지는 그냥 넘기면서 마지막까지 책을 읽었다.
책을 읽던 중에 문제를 발견했다면, 누구도 화를 내지 못할 책이다!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는 인도여행기를 담은 내용의 수필집이다. 몇 년 전 지구별 여행자를 세 번 읽은 나는 그의 인도 여행기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책 한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아껴 두었다가 읽고 싶었다. 왜냐하면 분명 내가 세 번이나 읽은 ‘지구별 여행자’와 비슷한 내용이기 때문에 내가 실망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읽었던 내용이 가물가물해질 즈음 먼저 썼다는 이 책을 읽으면 인도 여행의 감동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서 장 담가놓듯 책꽂이에 꽂아 두고서는 얼마 전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참 재미있게 책을 읽는 내 눈을 딱 막아서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백지 한 장이었다. 아마 인쇄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종이 한 장에 8장 혹은 16장을 인쇄해서 책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분명 뒤에도 백지가 나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나, 8페이지가 백지로 드러났다.
갑자기 먹먹해졌다. 평소와 같았다면 투덜거리면서 책을 바꾸러 갔거나 혹은 출판사에 항의 전화라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런 평상시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것도 분명 뭔가 메시지가 있는 것일 꺼야’라며 이상한 말을 하고는 백지가 된 종이를 넘겨서 연결되지 않는 부분부터 다시 읽었다.
류시화 작가의 존경스러운 인도 여행 체험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평소 ‘버럭’ 화를 잘 내는 내가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면서 잘못된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은 책 내용 때문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발견했다면 그냥 바꾸었거나, 출판사에 항의했을지도 모르지만 책을 1/3가량 읽다가 발견한 출판사의 실수는 그냥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류시화 작가는 인도 여행의 경험을 통해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물질에 집착하고 마음에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인연의 소중함, 집착을 버리는 방법, 용서하는 방법들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내가 화를 내지 못하게 미리 장치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특히 이 부분은 내가 출판사에 항의를 했을 경우 돌아올 듯한 대답이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업이에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는 일인 걸 내가 어쩌란 말인가요. 어쨌든 현실의 결과를 받아 들여야지요.”
다음 부분은 마치 내가 화가 날 것에 대해 대비해서 쓴 내용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내 잘못을 갖고 자신까지도 잘못된 감정에 휘말리는 군요. 그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건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음 부분은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잘못 만들어진 책일 지라도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것 같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가기를 기대하지 말라.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라.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오게 하고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가게 하라. 그때 그대의 삶은 순조롭고 마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읽은 내가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으며, 어떻게 책을 바꾸겠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출판사에서 일부러 이런 실수를 넣고 독자들을 테스트해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오늘 뭘 배웠소?
책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류시화 작가가 인도 여행을 하던 중 한 호텔 주인이 귀찮게 “그래,오늘 뭘 배웠소?”하고 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말로 둘러대던 작가는 나중에는 대답을 아예 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호텔 주인이 하는 말을 작가 본인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난 뭘 배웠지?”하고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작가 역시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배웠소? 하고.
난 이 책을 통해 참고 넘기는 법, 그리고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 결코 아무것도 아님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잘못 만든 책마저도 웃으면서 간직하게 만드는 류시화 작가의 인도 여행 체험에 대단함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도 인쇄되지 않은 부분의 내용은 여전히 궁금하다. --; 내가 읽지 못한 운명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BLABLA'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표절시비! 독자가 가장 큰 피해자다! (0) | 2008/11/14 |
|---|---|
| 두고두고 보는 잡지, 있으세요? (0) | 2008/10/15 |
| 기막힌 책 한권으로 깨달은 것. (0) | 2008/08/19 |
| 인터넷에 쓰레기만 있는 것은 아니죠?! (0) | 2008/07/25 |
| 아쉽다! 뉴욕에서 만난 우리 나라 광고 (14) | 2008/07/17 |
| 일본 아이들이 그린 아빠얼굴에서 찾은 노홍철 (0) | 2008/06/23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