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국씨(41세)
사진: gomdorine
사진 동호회에서 우연히 알게 된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딱 두 가지였다. 그가 전쟁세대가 키워낸 세대이자 인생의 허리부분을 걷고 있는 40대라는 것, 그리고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올라오는 그의 글들이 하나같이 허를 찌르듯 속알맹이가 보이지 않게 들어차서 웃음과 함께 의미심장함을 선사한다는 것.
왠지 그는 내가 아직 걸어보지 않은 마흔에 대해 알려줄 것 같았다.
우리는 '부모'의 바람으로 묶여 산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그런데 얼마전 둘이 싸우는 것을 보고는 울컥해서 매를 들었다. 여간해서 매질을 잘 안하는 그는 큰맘 먹고 아이들을 야단쳤다. 사실, 그는 싸우는 아이들을 보니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부인이 죽고 난 뒤, 아버지가 재가를 하셨고 그리고 그가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형들과 누나는 그를 돌봐주지 않았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셨지만, 형들과 누나는 그저 어머니와 그를 한발자국 물러서 있는 사람들로 치부해버렸다. 그랬으니, 그 역시 형들과 누나에게 그런 느낌을 가졌으리라. “그래서 내 자식들이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속상하지.”
그는 자신을 닮은 것 같은 아들에게 결국 손지검을 했다. 예전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자신의 옛날 모습을 지우려는 듯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상처를 붉은 얼굴로 드러내고 손지검을 했지만 결국 다친 건 그의 마음인 것 같았다.
담배 연기는 그의 붉은 얼굴을 조금씩 조금씩 가라 앉혀 주고 있었지만, 타 들어가는 담배처럼 그의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여느 우리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걱정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성장기 때문에 어머니가 남다르게 더욱 조심스레 키우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너는 이러지 말아라, 그런 건 안된다….’ 언제나 걱정과 한숨이 일상이 되어 그의 인생을 따라다녔다. 물론 지금, 부모가 된 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알 것 같단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인생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대학생이 되면서 답답함을 풀려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손으로 꼽아 본 것 중 50가지 달라졌다고 한다. 어머니의 ‘하지마라’에서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완전히 벗어났던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기 위해 일부러 웃긴 이야기를 하루에 한가지씩 친구들에게 늘어 놓기도 하고, ‘하하하’ 거리며 크게 웃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 동안 살아온 시간은 시계를 바라보며 바늘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 같았단다.
대학생이 된 뒤부터는 ‘어머니’와 별개가 된 사람처럼 흔들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안 할 만큼 잘 놀았고, 아니 놀았다기보다 아주 잘 지낸 것 같아요.”
어머니가 없는 시간은 그렇게 후련하고 속시원할 수 없었다.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싶은 대로. ‘후레 자식’을 걱정하는 이광구가 아니라, 그저 신나게 인생을 즐기는 이광구로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도 그리 길지만은 않았다. 그에게는 어머니에게 보여드려야 할 두 단계의 관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졸업과 동시에 치러져야하는 취업 그리고 결혼.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도 그의 꿈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대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학점을 받아, 졸업과 동시에 그는 멋지게 대기업에 취직을 하게 된다. 또, 어머니가 그렇게 바라던 결혼도 했다. 그리고 아이도 낳았다. 어머니의 주름살에 박힌 먼지까지도 깨끗이 씻어 나가는 듯, 그의 인생은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그리고 어머니를 욕되게 하지 않게 잘 풀려나갔다.
하지만 남들이 그리고 어머니도 잘 풀려나간다고 한 그의 인생. 이상하게도 본인은 그 인생에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고 살면서 뭐가 부족했던 것일까.
목구멍에 몇 년 동안 묵힌 찰떡이 ‘쿡’ 박힌 듯 그는 그 부족함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꿈은 ‘파일럿’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건축 일을 하고 있었다. 뭐, 비행장 건설이나 비행 도로 닦는 일이라도 했으면 모르는데, 비행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파트 건축일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인정을 받으면 뭐해. 사회 생활이 다 그렇겠지만, 너무나 신물나는 일들의 연속…. 만약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참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명감 조차도 없었기에 그런 일들을 참기가 어렵더라구.”
그가 겪은 사회 생활의 참담함은 다음과 같다.
1 다른 좋은 회사로 옮기려 했으나, 윗사람이 붙잡았다. 그런데 몇 달 뒤, 그 윗사람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2 직급이 올라가니 ‘불의’와 타협해야 하는 일이 쌓이고 쌓였다. 무조건 굽신 거릴 수도 없고, 무조건 뻣댈 수도 없는 이상야릇한 일들.
3 선배들이 과로로 쓰러져 죽기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코피 한번 쏟지 않고 그냥 새하얀 얼굴로 사라졌다.
그는 차라리 혼자 붕어빵을 굽더라도 본인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졌다. 뒤늦게 반항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어머니, 부인이 반대하는 것을 꾹 참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는 자영업의 세계로 빠지게 된다. 그가 처음 시작한 가게는 ‘일식집’이었다.
사진 : gomdorine
꿈의 파랑새는 항상 움직여야 한다!
어머니와 부인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자영업의 세계가 마음에 들었단다. 아니 아직도 마음에 든다.
일식집을 거쳐 일명 ‘풀스’방을 운영했고 지금은 pc방을 운영 중이다. (2008년 현재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려고 노력중이란다.)
“불규칙한 생활과 수입 때문에 아내는 좀 꺼려하지만, 나는 내가 찾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취미 생활도 할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정보도 듣고 새로운 생각도 공유하게 되고.”
그래서인지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밤새 나눌 이야기거리가 조금씩 떨어지는 느낌이 든단다.
“나는 ‘나’처럼 살아가야 좋은 것 같아요. 누구에 의해서, 누군가 원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반항을 보였던 그지만. 어머니의 아들이 아닐 수는 없다. 몇 년 전, 어머니가 허리를 다쳐서 거동도 못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 6개월 동안 병수발을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그가 대기업을 박차고 나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그 일도 그가 원하는 일이니까. 어머니의 병수발을 든 것도 반항으로 쳐야할까?
마흔의 몸을 하고 스무 살로 살고 싶다는 그. 남이 만들어 놓은 것 말고, 정말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생각하면, 꿈은 그저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매번 변하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 매번 자신의 마음 속에서 외쳐지고 또 움직이는 것 같다.
어머니 때문에 숨죽여 살아왔던 시간이 오히려 그에게는 그런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아무렇지 않게 살았다면 자신만의 꿈을 찾고 인생을 찾는 데 갈망할 만큼의 폭발할 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니까.
“어릴 때 갖던 꿈은 버리진 않았지만…. 마흔을 넘기고 보니 꿈이란 것은 그저 끊임없이 움직이고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우고 생각하고 즐거워하는 것인 것 같구려!”
*이 인터뷰는 2005년 8월 15일에 있었습니다.
사진 동호회에서 우연히 알게 된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딱 두 가지였다. 그가 전쟁세대가 키워낸 세대이자 인생의 허리부분을 걷고 있는 40대라는 것, 그리고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올라오는 그의 글들이 하나같이 허를 찌르듯 속알맹이가 보이지 않게 들어차서 웃음과 함께 의미심장함을 선사한다는 것.
왠지 그는 내가 아직 걸어보지 않은 마흔에 대해 알려줄 것 같았다.
우리는 '부모'의 바람으로 묶여 산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그런데 얼마전 둘이 싸우는 것을 보고는 울컥해서 매를 들었다. 여간해서 매질을 잘 안하는 그는 큰맘 먹고 아이들을 야단쳤다. 사실, 그는 싸우는 아이들을 보니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부인이 죽고 난 뒤, 아버지가 재가를 하셨고 그리고 그가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형들과 누나는 그를 돌봐주지 않았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셨지만, 형들과 누나는 그저 어머니와 그를 한발자국 물러서 있는 사람들로 치부해버렸다. 그랬으니, 그 역시 형들과 누나에게 그런 느낌을 가졌으리라. “그래서 내 자식들이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속상하지.”
그는 자신을 닮은 것 같은 아들에게 결국 손지검을 했다. 예전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자신의 옛날 모습을 지우려는 듯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상처를 붉은 얼굴로 드러내고 손지검을 했지만 결국 다친 건 그의 마음인 것 같았다.
담배 연기는 그의 붉은 얼굴을 조금씩 조금씩 가라 앉혀 주고 있었지만, 타 들어가는 담배처럼 그의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여느 우리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걱정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성장기 때문에 어머니가 남다르게 더욱 조심스레 키우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너는 이러지 말아라, 그런 건 안된다….’ 언제나 걱정과 한숨이 일상이 되어 그의 인생을 따라다녔다. 물론 지금, 부모가 된 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알 것 같단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인생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대학생이 되면서 답답함을 풀려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손으로 꼽아 본 것 중 50가지 달라졌다고 한다. 어머니의 ‘하지마라’에서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완전히 벗어났던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기 위해 일부러 웃긴 이야기를 하루에 한가지씩 친구들에게 늘어 놓기도 하고, ‘하하하’ 거리며 크게 웃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 동안 살아온 시간은 시계를 바라보며 바늘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 같았단다.
대학생이 된 뒤부터는 ‘어머니’와 별개가 된 사람처럼 흔들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안 할 만큼 잘 놀았고, 아니 놀았다기보다 아주 잘 지낸 것 같아요.”
어머니가 없는 시간은 그렇게 후련하고 속시원할 수 없었다.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싶은 대로. ‘후레 자식’을 걱정하는 이광구가 아니라, 그저 신나게 인생을 즐기는 이광구로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도 그리 길지만은 않았다. 그에게는 어머니에게 보여드려야 할 두 단계의 관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졸업과 동시에 치러져야하는 취업 그리고 결혼.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도 그의 꿈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대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학점을 받아, 졸업과 동시에 그는 멋지게 대기업에 취직을 하게 된다. 또, 어머니가 그렇게 바라던 결혼도 했다. 그리고 아이도 낳았다. 어머니의 주름살에 박힌 먼지까지도 깨끗이 씻어 나가는 듯, 그의 인생은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그리고 어머니를 욕되게 하지 않게 잘 풀려나갔다.
하지만 남들이 그리고 어머니도 잘 풀려나간다고 한 그의 인생. 이상하게도 본인은 그 인생에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고 살면서 뭐가 부족했던 것일까.
목구멍에 몇 년 동안 묵힌 찰떡이 ‘쿡’ 박힌 듯 그는 그 부족함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꿈은 ‘파일럿’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건축 일을 하고 있었다. 뭐, 비행장 건설이나 비행 도로 닦는 일이라도 했으면 모르는데, 비행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파트 건축일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인정을 받으면 뭐해. 사회 생활이 다 그렇겠지만, 너무나 신물나는 일들의 연속…. 만약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참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명감 조차도 없었기에 그런 일들을 참기가 어렵더라구.”
그가 겪은 사회 생활의 참담함은 다음과 같다.
1 다른 좋은 회사로 옮기려 했으나, 윗사람이 붙잡았다. 그런데 몇 달 뒤, 그 윗사람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2 직급이 올라가니 ‘불의’와 타협해야 하는 일이 쌓이고 쌓였다. 무조건 굽신 거릴 수도 없고, 무조건 뻣댈 수도 없는 이상야릇한 일들.
3 선배들이 과로로 쓰러져 죽기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코피 한번 쏟지 않고 그냥 새하얀 얼굴로 사라졌다.
그는 차라리 혼자 붕어빵을 굽더라도 본인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졌다. 뒤늦게 반항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어머니, 부인이 반대하는 것을 꾹 참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는 자영업의 세계로 빠지게 된다. 그가 처음 시작한 가게는 ‘일식집’이었다.
꿈의 파랑새는 항상 움직여야 한다!
어머니와 부인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자영업의 세계가 마음에 들었단다. 아니 아직도 마음에 든다.
일식집을 거쳐 일명 ‘풀스’방을 운영했고 지금은 pc방을 운영 중이다. (2008년 현재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려고 노력중이란다.)
“불규칙한 생활과 수입 때문에 아내는 좀 꺼려하지만, 나는 내가 찾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취미 생활도 할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정보도 듣고 새로운 생각도 공유하게 되고.”
그래서인지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밤새 나눌 이야기거리가 조금씩 떨어지는 느낌이 든단다.
“나는 ‘나’처럼 살아가야 좋은 것 같아요. 누구에 의해서, 누군가 원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반항을 보였던 그지만. 어머니의 아들이 아닐 수는 없다. 몇 년 전, 어머니가 허리를 다쳐서 거동도 못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 6개월 동안 병수발을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그가 대기업을 박차고 나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그 일도 그가 원하는 일이니까. 어머니의 병수발을 든 것도 반항으로 쳐야할까?
마흔의 몸을 하고 스무 살로 살고 싶다는 그. 남이 만들어 놓은 것 말고, 정말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생각하면, 꿈은 그저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매번 변하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 매번 자신의 마음 속에서 외쳐지고 또 움직이는 것 같다.
어머니 때문에 숨죽여 살아왔던 시간이 오히려 그에게는 그런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아무렇지 않게 살았다면 자신만의 꿈을 찾고 인생을 찾는 데 갈망할 만큼의 폭발할 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니까.
“어릴 때 갖던 꿈은 버리진 않았지만…. 마흔을 넘기고 보니 꿈이란 것은 그저 끊임없이 움직이고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우고 생각하고 즐거워하는 것인 것 같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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